美中 등 치열하게 물밑경쟁
한국은 전략도 조직도 전무
인재양성·표준 확보 서둘러
기준 제시하는 설계자 돼야
기술력이 곧 시장지배력을 의미하던 시대는 끝났다. 기술패권의 본질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세계가 따르게 만드는 '표준'의 선점에 있다. 표준은 단순한 기술 사양이 아니라, 산업 질서와 시장 접근권을 결정하는 규칙의 권력이다.
국제 무대에서는 이미 표준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중국 표준 2035'를 통해 인공지능(AI), 5G, 스마트시티, 전기차 충전 등의 분야에서 자국 기술을 국제 표준으로 만들고 있다. 화웨이와 ZTE는 5G 표준특허를 선점하며 이를 통해 기술 경쟁을 넘어 시장 질서 자체를 설계하는 위치에 올랐다.
미국 역시 표준 경쟁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테슬라는 자사의 전기차 충전 규격(NACS)을 북미 지역의 사실상 표준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GM, 포드 등 경쟁사도 이를 채택하면서 충전 인프라스트럭처 주도권이 테슬라에 넘어갔다. 기술 성능뿐 아니라 인프라의 기준을 설계한 기업으로 거듭난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엔비디아다. AI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는 엔비디아는 단순한 칩 제조사를 넘어 자사 그래픽처리장치(GPU) 아키텍처(CUDA)를 글로벌 표준처럼 자리 잡게 만들었다. 오늘날 AI 생태계의 수많은 연구자와 기업이 CUDA를 중심으로 AI를 개발하고 있으며, 엔비디아는 기술 제공자를 넘어 생태계의 규칙 제시자가 됐다.
이처럼 표준을 선점한 기업과 국가는 산업 생태계를 설계하고 규칙을 제시하는 구조적 우위를 확보한다. 기술의 수출자가 아니라 산업의 질서를 통제하는 설계자가 되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제조 역량을 갖췄지만, 국제 표준화 경쟁에서는 여전히 주변에 머물러 있다. 국제표준기구 내 한국 전문가의 비율이 낮고, 주도적 역할을 하는 사례도 드물다. 기술은 있으나 세계가 따르는 기준으로 만들 전략과 조직이 부재한 것이다.
문제는 이 구조적 약점이 정부 정책, 기업 인식, 대학 교육 전반에 걸쳐 고착돼 있다는 점이다. 정부의 연구개발(R&D) 정책은 표준화와의 연계가 약하고, 기업은 표준화를 비용으로 인식한다. 대학도 관련 교육이 부족해 전문 인재 양성이 어렵다. 이대로라면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술이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근본적인 전략 전환이 필요하다. 표준은 기술이 작동할 시장의 입구이자 규칙 그 자체다. 정부는 표준화 전략을 국가 핵심 과제로 삼고, 산업통상자원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특허청 등 부처 간 협업 체계를 제도화해 R&D 과제 평가에도 표준화 전략의 연계를 의무화해야 한다.
학계는 표준화 인재를 양성하는 거점이 돼야 한다. 학부 과정부터 표준화 기초를 교육하고 특히 공학, 경영, 법학 등 학제 간 융합을 통해 표준 실무와 정책을 이해하는 융합형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
기업은 기술 개발만큼이나 규칙 설계에 투자해야 한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특허-표준-시장'이라는 3단계 선순환 구조를 통해 기술력을 시장 지배력으로 전환하고 있는바, 우리 기업들도 표준 확보를 글로벌 시장 전략의 핵심축으로 삼아야 한다.
정부와 산업계는 함께 특정 산업 분야에서 'K표준'을 글로벌 표준으로 끌어올리는 선도형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 AI 윤리, 디지털 헬스케어, 스마트팩토리, 탄소중립 기술 등 미래 핵심 분야에서 우리가 국제 표준을 주도하면 기술을 넘어 산업 전반의 질서를 주도할 수 있다.
표준은 시장과 규칙, 미래 그 자체를 설계하는 프레임이다. 기술 경쟁력은 '결과'지만, 표준 경쟁력은 '질서' 그 자체다. 이제는 기술을 개발하는 나라를 넘어, 기술의 기준을 제시하는 나라가 돼야 할 때다.
[최정일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한국경영학회 차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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