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기업 새 성장축 삼고
인적자원 재투자는 필수
복지, 성장 밑거름으로
한국 경제는 지금 저성장 기조와 심화되는 양극화라는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거에는 "먼저 성장, 나중에 분배"라는 공식이 통했지만 이제는 성장 속도가 둔화되고, 불균형의 심화가 더 빠르다. 단순히 성장만 강조하거나 복지 지출을 늘리는 방식으로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장과 분배가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하는 선순환 구조다.
전통적으로 한국 경제는 대기업 중심의 제조·수출 산업에서 활력을 얻어왔다. 하지만 이 성장 엔진은 점차 동력을 잃고 있다. 한국은행의 전망이 경고하듯, 1980년대 8%를 넘었던 잠재성장률은 2040년대에는 0%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한국 경제의 체력이 근본적으로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다. 무너지는 성장 잠재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성장 축을 찾아야 한다. 답은 기술 혁신과 산업 생태계 재편에 있다.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바이오, 콘텐츠 등 선도 산업과 조선, 방위 및 반도체 같은 전략적 산업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하고, 스타트업이 자유롭게 실험하고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척박한 내수시장과 제한된 자원에도 불구하고 '혁신 허브(innovation hub)' 전략을 통해 글로벌 스타트업 국가로 도약했다. 한국도 이처럼 혁신 역량이 축적되는 생태계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성장은 결국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단순히 대학 진학률을 높이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되고, 평생교육 체계와 재숙련(reskilling) 및 상향숙련(upskilling)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노동시장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일자리 안정과 전환을 동시에 보장하는 정책은 필수다. 덴마크의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 모델처럼 노동자가 해고되더라도 재취업 훈련과 사회적 안전망이 뒷받침된다면 장기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분배의 질도 개선될 것이다. 한국이 직면한 저출산·고령화 문제까지 고려한다면 인적자원의 재투자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분배 정책 역시 단순한 복지 확대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은 소득 격차를 넘어 자산 격차가 더 심각하다. 통계청이 지난해 12월에 발표한 조사 자료(2023년 소득 기준)에 따르면 소득 지니계수는 0.323이지만, 순자산 지니계수는 0.612에 달한다. 부동산 가격 급등이 그 원인이고,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주장했듯 자본 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초과할 때 부의 집중은 심화된다.
세계 각국의 사례는 분명한 교훈을 준다.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성장과 분배의 균형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스웨덴은 '사회연대임금제'를 통해 임금 격차를 줄이며 산업 재편을 앞당겼다. 반면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는 성장을 뒷받침하지 못한 복지 포퓰리즘으로 재정 파탄에 빠졌다. 미국은 기업 자율과 시장 경쟁을 중시해 높은 성장률을 달성했지만, 불평등이 심화되며 성장과 분배의 긴장 관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결국 핵심은 정부 정책의 신뢰성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없으면 시장과 기업, 개인은 움직이지 않는다. 정부가 재정 확대를 발표하더라도 시장이 이를 불안 신호로 해석한다면 효과는 반감된다. 반대로 정책이 일관되게 유지되고 신뢰할 만하다면 기업은 장기 투자와 연구개발 그리고 혁신에 나설 수 있다.
결국 한국 경제는 과거의 성장 공식을 반복할 수 없다. 기술 혁신, 인적자원 투자, 노동·자산 정책, 사회안전망, 그리고 신뢰성 있는 정책 신호가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한다. 성장이 분배를 떠받치고, 분배가 다시 성장을 강화하는 구조야말로 사회적 통합과 지속가능한 미래를 여는 관건이 될 것이다.
[최정일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한국경영학회 차기회장]
https://www.mk.co.kr/news/contributors/11437243